라이프로그


편지 by dichter



헤어지지 않으면 안 되었기 때문에 헤어진 후, 사실 아무 할 말이 없지만 나는 너에게 편지를 쓰려고 한다.
한번 시도해 보는거야. 아니 써야만 한다고 생각해. 왜냐하면 팡테옹에서 성녀의 그림을 보았기 때문이야, 외로워 보이는 성녀와 지붕, 문짝, 희미하게 빛을 비추고 있는 램프와 저 쪽에서 잠자고 있는 시가지, 강 그리고 달빛에 비치는 먼 곳을 보았기 때문에. 성녀가 잠자고 있는 시가지를 지키고 있었어. 울고 또 울었어. 그 모든 것이 갑자기 너무나 뜻밖에 나타났어. 나는 성녀 앞에서 울었지. 자신을 가눌 수 없었거든.

내가 파리에 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뻐하고 부러워해. 일리가 있지. 파리는 엄청난 대도시이고, 또 온갖 의미에서 나 역시 그런 유혹들에 빠져버렸다고 말할 수 있어. 그렇다고밖에 달리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. 내가 파리의 그런 유혹에 빠져버려 내 성격이 달라지지는 않았더라도 결과적으로 어떤 변화를 가져온 셈이야. 그러니까 내 세계관의 변화랄까, 어쨌든 내 생활에 변화를 가져오게 했어. 이로 인해 내가 모든 사물을 보는 관점이 내부에서 완전히 다르게 형성되었지. 어떤 차이가 있는가 하면, 지금까지 내가 알던 그 어떤 것보다 더 많이, 인간으로부터 나를 격리시키게 되었다는 거야. 하나의 달라진 세계, 온통 새로운 의미를 지니는 하나의 새로운 삶. 그렇게 되어버렸어. 모든 것이 너무나 달라져서, 지금 이 순간 모든 것이 너무나 새로워서 나를 다소 힘들게 하고 있어. 새로운 환경 속에서 나는 신출내기인 셈이지.

한 번 바다를 볼 수는 없을까? 그래, 나는 다만 네가 와줄 수도 있을 거라고 상상하고 있어. 너는 내게 물어볼 수도 있었을 텐데. 의사를 알아보는 것을 잊어버렸지. 그런데 이제는 그럴 필요가 없게 되었어.

<시체>라는 보들레르 믿을 수 없는 시를 아직도 기억하고 있니? 나는 이제야 그 시를 이해할 수 있는지도 몰라. 마지막 연을 빼고는 그의 표현이 옳았어. 그런 일을 당했으니 그가 어떻게 해야 했을까? 이 끔찍한 것 속에서, 겉보기에 혐오스럽게만 보이는 것 속에서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게 통용되는 존재성을 보는 게 보들레르에게 주어진 과제였던거야. 선택이나 거부는 없었지. 너는 플로베르가 <성 쥘리엥 수도사의 전설>을 쓴 것이 우연이라고 생각하니? 누군가가 밤에 나환자와 함께 자면서 사랑하는 사람의 따뜻한 마음으로 그를 포근하게 해줄 수 있을지 아닐지가 나에게는 몹시 중요하게 여겨져. 그렇게 된다면 세상이 나쁜 곳일 리가 없지.

내가 이곳에서 실망해서 괴로워하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마. 그 반대거든. 비록 현실이 나쁘다 하더라도, 나는 그 현실을 위해 내가 기대했던 모든 것을 포기할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어. 때때로 스스로조차 놀라곤 하지.

아, 이런 것을 조금이라도 너와 나눌 수 있다면 좋을텐데. 그러나 그렇게 될 수 있을까? 그렇게 될 수가? 아니야, 이것은 고독의 대가일 뿐이야.


라이너 마리아 릴케, <말테의 수기>
민음사, 문현미 역.
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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